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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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7월 11일, 매직 투어 중 영국 웸블리 스타디움 공연에서. |
I won’t be a rock star. I will be a legend. 나는 락 스타가 아니라, 전설이 될 것이다.
영국의 록 밴드 퀸의 리드 보컬 겸 프론트맨.
2. 유년기-대학 시절

동아프리카 인도양 해안에 위치한 섬인 잔지바르에서 총독부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8세기에 무슬림에 쫓겨 페르시아에서 인도의 구자라트로 피신해 정착한 조로아스터교도의 후손인 파르시이며, 본명은 파로크 불사라(구자라트어: ફારોખ બલસાર, Pharōkh Balsār)이다. 파로크란 이름을 사람들이 발음하기 어려워해서 프레디란 별명을 많이 썼다. Freddie로 불린 이유
프레디 머큐리의 아버지 보미 불사라(Bomi Bulsara)는 8형제 중 하나로 태어났는데, 그의 고향은 인도 구자라트 주의 불사르(Bulsar)라고 한다. 불사라라는 성은 프레디의 아버지가 잔지바르로 건너오면서 고향 마을의 이름을 따서 그대로 붙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실제로 프레디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삼촌, 백부들도 모두 하나둘씩 잔지바르로 건너와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부모님과 친척들이 인도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그들은 파르시로 정통 인도 혈통이 아니고 독실한 파르시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페르시아계 혈통이라고 한다. 프레디의 부모님들도 생전 자신들을 인도라는 출신 배경보다 파르시라는 걸 훨씬 강조하며 살았다고 한다.
어린 머큐리는 잔지바르의 성공회 학교에서 수녀들에게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머큐리의 부모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8세 때 그를 인도에 있는 학교에 보내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머큐리는 인도 뭄바이 동남쪽에 위치한 판치가니(Panchgani)의 성 베드로 성공회 성당(Saint Peter church of England)에서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이 학교는 모든 종교의 학생들을 아무런 차별 없이 받아들였으며, 기본적인 성경공부와 채플 외에는 학생들의 종교생활에 크게 간섭하지 않아서, 당시 머큐리가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를 충실히 따르며 학생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가족과 떨어져서 공부하는 것을 무척 괴로워했다고 하며, 그 때문에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으로 자란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음악에는 일찍이 두각을 보여서, 학창 시절 합창부에서 활동을 하기도 하고 교내 밴드에서 건반을 치기도 했다. 음악 외에도 미술과 스포츠를 잘했고, 특히 탁구와 복싱은 교내 챔피언이었다고. 하지만 Lesley-Ann Jones의 프레디 머큐리 바이오그래피에 따르면 프레디의 인도 유학은 끝이 좋지 못했다. 처음에는 인도의 기숙학교에서 적응하며 잘 다니는 듯했지만 학교에서 공부하던 막바지 즈음에는 성적도 확 떨어지고 프레디 본인도 방황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뭄바이에서, 학창 시절 프레디. 치아가 신기하다. 거의 만화에서 나올 법한 수준의 뻐드렁니가 돋보인다.
어쨌든 인도에서 학교를 다닐 때는 딱히 큰 사고를 치거나 말썽을 부리지는 않았다고 한다. 인도에서 같이 학교를 다녔던 프레디의 동창들은 그를 밝고 좋은 아이였다고 회고했다. 여성들에게 대화를 걸지 못하는 쑥맥도 아니었고 남녀 가리지 않고 고루 친구를 사귀었다고 한다. 지인들에게 달링, 하며 친근하게 말을 거는 습관은 그때부터 나타나고 있었다고. 훗날 그의 컴플렉스가 되는 뻐드렁니도 그때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던 것 같다. 프레디의 동창들은 프레디를 bucky(뻐드렁니)라는 별명으로 부르고는 했는데 훗날 프레디에 대해 기억하는 동창들은 파로크나 프레데릭이라는 이름보다 버키라는 별명으로 그를 자주 칭할 정도였다.
인도에 유학까지 갈 정도로 집안 사정이 좋은 편이었는데, 잔지바르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직후인 1964년에 술탄정이 전복되고 공화정이 수립되면서 기존의 지배층인 아랍인들과 페르시아인, 인도인들이 수천명 가량이 학살되고 백인들은 추방됐다. 백인 이외에 살아남은 이들도 재산의 절반가량을 압수당하는 조건으로 추방되었는데, 재산이 많던 프레디 머큐리의 가족들도 상당수의 재산을 빼앗기고 프레디와 함께 잔지바르를 떠날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영국으로 이민을 간 후 집안 사정이 많이 안 좋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프레디 머큐리도 아르바이트를 했어야만 했는데, 비행기 화물칸에서 짐을 옮기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동료들에게 자기는 알아주는 뮤지션이라고 뻥을 쳤다. 단순한 허세였지만, 프레디 머큐리 스스로가 뮤지션이 될 것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말한 첫 번째 발언이었다.

영국에서 일링 예술 대학(Ealing Art College) 그래픽 디자이너 학사로 대학을 마쳤다. 아무래도 당시에 1970년대 초에 그럴듯한 대학에 다니고 있던 엘리트였고 음악을 하지 않았어도 먹고 살 길이 충분히 많았기 때문에 음악을 직업으로 삼을 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퀸에 가입한 이후 직업 뮤지션으로 살아가기로 결단을 내렸고, 친한 친구에게 ‘아무래도 나는 음악을 해야 될까 봐.‘라고 말했었다고. 후에 이는 신의 한 수가 된다.
프레디 머큐리가 워낙 노는 것을 좋아했고, 당시 영국 대학생들도 술파티 같은 것을 빈번하게 했기 때문에 친구들과 모여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숙취에 쩔어 새벽에 집단으로 널브러져 있던 일도 자주 있었다. 그리고 그런 파티에서 프레디가 기타를 연주하며 존 레논의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그 목소리가 아주 끝내줬었다고 한다. 참고로 프레디 머큐리는 인터뷰에서 존 레논에 대해 레논은 가장 위대한 뮤지션이고 유일무이한 독특한 존재이며 그를 무척 존경한다고 밝혔을 정도로 그의 팬이었다. 퀸의 정규 10집 앨범 Hot Space에서는 존 레논에 대한 헌정곡인 <Life Is Real (Song For Lennon)>을 써서 수록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프레디는 지미 핸드릭스의 광팬이었다. 그의 공연을 14일 연속으로 관람하기도 했고, 직접 그린 지미 핸드릭스 드로잉이나 그에 대한 논문도 팔았다고 한다.

대학 시절 기타를 연주하는 프레디. 위에 비틀즈 멤버 조지 해리슨의 포스터가 보인다. 대학 친구들은 이 때부터 프레디가 뭔가 될 법한 떡잎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 한다.
3. 퀸
대학 재학 중에 아마추어 밴드 활동을 하다가 로저 테일러와 브라이언 메이가 이끌던 스마일을 유심히 지켜보던 프레디는 보컬 팀 스타펠의 소개로 두사람과 만나게 된다.이후 팀 스타펠이 ‘Humpy Bong’ 이라는 밴드에 가입하기 위해 스마일을 탈퇴하자 바로 그 빈 자리를 꿰찼다. 그리고 팀의 베이스 오디션을 보았고 세 번의 오디션 끝에 베이시스트 존 디콘을 영입, 퀸이 탄생하게 되었다. 후일 로저는 스마일 시절에 웬 이상한 녀석이 공연마다 와서 공연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잔소리를 했는데 그게 프레디였고 그 잔소리가 밉지 않은 녀석이었다고 밝혔다.
팀 스타펠은 프레디와 여러모로 죽이 맞는 친구였었다고 한다. 대학 강의실에서 프레디와 팀 스타펠이 책상을 두들기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동기들은 “쟤네 또 노래 부르면서 논다” 식으로 웃어 넘겼다는 듯. 평전에 따르면 프레디는 내성적이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쾌활한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낯선 사람들이나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는 내성적으로 입을 다물고 침묵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친한 사람들 앞에서는 그렇게 노래도 부르고 장난도 치고 크게 떠들기도 했다고.
퀸이나 프레디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면 자주 나오는 증언 중 하나가 무대 위의 프레디와 일상 생활 속에서의 프레디는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는 것이다. 무대 위에서는 남성적이고 다이나믹한, 굉장히 쾌활하면서 에너지 넘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면 일상 속에서의 프레디는 내성적이고 감성적인 면을 자주 보였다고 한다. 프레디가 죽은 이후 애인이었던 짐 허튼이 방송에 나와 증언하기로 일상 생활 속의 프레디는 ‘내성적인 보통 사람’이었다고.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보아도 일상에서의 프레디는 내성적이며 복잡한 사연을 가진, 알 수 없는 부문이 있는 그런 외로운 인물이었다는 식의 말이 종종 나온다.
로저와 브라이언은 프레디와 처음 만났을 때 서로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브라이언 메이는 이미 스마일 이전에도 <1984>라는 밴드를 만들어 근방에서 이름을 날렸던 적이 있었고, 로저 테일러는 대학에 오기 전 고향에서 아마추어 밴드 활동을 하면서 역시 이름을 날렸었다고 한다. 좋은 멤버를 구하지 못해 이리저리 아마추어 밴드를 옮겨다녔던 프레디에게는 실력 좋은 기타리스트와 드러머가 더더욱 눈에 들어왔을 것이라고. 프레디는 스마일의 공연에 매니저처럼 따라다니면서 팬을 자처하고 잔소리도 늘어놓았다. 팀 스타펠이 탈퇴하고 스마일이 기획사에서도 버림받는 밴드가 되자, 로저와 브라이언은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프레디가 생각나서 그에게 연락을 취해 가입을 문의했다. 이런저런 아마추어 밴드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던 프레디는 고민도 없이 바로 OK했다고.

퀸의 로고는 프레디가 디자인했으며, 위의 자켓도 프레디의 작품. 이 로고는 4, 5집 이외의 앨범에도 자주 사용되었다. 로고에 들어가는 동물들은 멤버들의 생일 별자리를 나타낸다고 한다.
밴드 이름을 ‘Queen’ 으로 제안한 것도 프레디 머큐리였다. 처음에 다른 멤버들은 퀸이란 밴드명에 반대했다고 한다. 퀸이라는 단어에는 속어로서 ‘gay’와 같은 의미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레디 머큐리는 퀸이라는 이름을 고집했고, 다른 멤버들은 그 고집을 이기지 못해 결국 밴드 이름을 퀸으로 결정하게 된다.
퀸 초기에는 글램 락의 영향을 받아 긴 머리, 검은 매니큐어, 검은 눈화장, 나비 날개같은 옷, 몸에 딱 붙는 타이즈(발레복)를 주로 입었는데 손발이 오글거리는 의상이지만 강한 인상과 큰 얼굴을 가진 것치고는 몸매, 특히 하체가 길고 가는 편이라 의외로 또 소화를 잘 했다. 이 중에서 날개 의상은 곧 자취를 감추지만 타이즈는 퀸 중반기(1976~1978)에도 종종 보이기도 한다.
퀸 초기의 프레디는 무대조명과 의상에 유난히 집착했다고 한다. 공연 준비 금액의 절반 가까이를 의상과 조명에 쏟아부을 정도였다고. 게다가 도저히 남들이 이해를 하지 못하는 기괴한 의상을 멤버들에게 입으라고 강요해서 퀸이 공연 준비를 하는 대기실에서는 ‘으악! 도저히 이런 거 못 입겠어!’ 라는 소리가 자주 튀어나왔었다고. 특히 퀸에서 나이가 제일 어리고 성격이 수줍었던 멤버 존 디콘이 이상한 의상을 자주 강요받아서 난감했던 적이 많았었다고 한다.

라이브에서 이런 옷 입고 무대를 뛰어다니는데 좀 민망하긴 하다. 덕분에 수년 동안 세상에서 가장 옷을 못입는 팝 아티스트의 1등을 차지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프레디는 1집을 녹음하면서 장난 삼아 “로네츠(The Ronettes)”의 “I Can Hear Music”을 녹음했던 적이 있다. 의외로 녹음 퀄리티가 좋아서 음반으로 발매했는데, 이때 본명을 쓰지 않고 ‘Larry Lurex’ 라는 이름으로 발매했다. 물론 당시에 프레디는 무명의 가수였기 때문에 본 이름으로 발매한 음반도 사실상 묻혔었는데, 나중에 이것이 프레디가 무명 시절에 녹음했던 앨범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지금은 수집가들 사이에서 꽤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고 한다. 젊은 시절 프레디의 미성을 느낄 수 있는 곡이다.
3집 발매 전까지 퀸은 여타 무명 밴드가 그렇듯이 금전 사정이 좋지 않았다. 이는 프레디도 마찬가지라 퀸이 처음으로 방송 출연을 했을 때 길거리 가전제품매장에 진열된 TV로 방송에 나온 자신의 모습을 봐야 했다고.
데뷔 앨범인 <Queen>을 시작으로 점점 이름을 알리면서 명곡 <Bohemian Rhapsody>가 수록된 <A Night at the Opera>가 대박을 치면서 인기를 얻었으나 이상하게 평론가들한테는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듣기 좋은 육자배기도 한두 번인데 자기 까는 소리를 줄창 들으니 좋은 감정이 생길 리가 만무. 인터뷰도 잘 안 하고 평론가들에 대한 감정도 무척 좋지 않았다. 특히 성 정체성 때문에 더 그랬는데 프레디의 게이 의혹과 개인 사생활을 파헤치려는 찌라시를 생산해내는 언론의 행태로 그는 언론을 더욱 불신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프레디는 여러모로 언론에서 가십거리가 되기 쉬웠다. 일단 인종 측면에서 보자면 일단 프레디 본인이 유럽인이 아니었다. 프레디는 인도계 파시족, 즉 영국에서도 차별받기 쉬운 아시안 인종이었고 뿐만 아니라 어릴 적에 영국으로 이민을 온 사람이었다. 어릴 적에 멀리 있는 잔지바르에서 영국으로 이민 온 파시족 혈통은 그 시절 온갖 차별과 혐오를 받기에 충분했다. 지금도 유럽 각지에서 인종차별, 혐오 범죄가 심심찮게 터지고 있는데 세계 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 시절에는 오죽했을까. 프레디의 절친했던 친구 엘튼 존은 ‘만약 프레디 머큐리가 영국에서 태어난 유럽인이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씁쓸하게 말하기도 했다.
게다가 이런 태생적 정체성이 있었던 마당에 양성애 성향도 있었으니 언론에서는 더없이 공격하기 쉬운 대상이었던 셈. 프레디가 언론과 평론가들을 불신했던 이유는 자신의 이러한 정체성을 이유로 공격을 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나중에 프레디도 평론가들의 계속된 악평에 짜증이 폭발했는지 “그 새끼들이 뭐라고 지껄이든 상관 안해요.” 라는 식으로 소리를 질렀다는 후문도 있다.
무대를 휘젓고 다니는 거친 록 뮤지션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게 클래식 음악이나 오페라, 발레 같은 장르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다. 그의 이런 음악 성향은 어릴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었다. 게다가 판타지 전설 같은 것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관심사 덕분에 퀸 초기 가사에는 ‘요정’이나 ‘괴물’, ‘정의의 기사’ 같은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동시대 영국 밴드들에 비해 유럽적인 감성이 짙은 퀸의 음악과 맞물려 엄청난 시너지를 일으켰다.
프레디 머큐리의 70년대와 80년대 보컬이 차이가 크다. 70년대에는 아름다운 미성을 토대로 비성과 구강 공명을 적절히 활용하며, 적절히 가성을 넘나드는 방식을 주로 썼는데 80년대에 들어서서는 구강 포먼트를 최대로 하고 목을 조으고 댐핑을 엄청나게 줘서 드라마틱한 탁성을 유도했다. 이는 한국의 판소리 명창들이 주로 쓰는 방식이다. 또 뒤로 먹는 소리나 목을 조은 가성도 많이 썼다. 이러한 창법의 변화로 1970년대 공연엔 창법이 목에 무리가 가는 수준은 아니어서 컨디션 분배도 잘 됐는데, 1980년대 공연부터는 성대에 엄청 무리를 주는 창법으로 인해 (먹는 소리, 턱으로 누르는 소리 등) 목에 피로가 빨리 축적되어서 공연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달린다. 이런 경향은 마지막 투어인 매직 투어에서 두드러진다.
참고로 콧수염을 처음 기른 것도 1980년부터다. 즉, 이 때부터 아예 노래 스타일이나 패션 스타일까지 바꿔버린 것. 때문에 콘서트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프레디 다큐멘터리인 Who Want To Live Forever에서 지인들의 인터뷰를 보면 미국 뉴욕 여행에서 게이 클럽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이 때 프레디가 이때 미국의 게이문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더 이상 발레복을 입지 않고 가죽자켓에 짧은 머리에 콧수염을 길르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80년 이후 갑자기 목소리가 바뀌어 버린 이유에 여러 추측이 있지만 추구하는 음악이 달라진 것도 큰 영향을 줬을 것이고, 성대 폴립이 생기고 줄담배를 피우면서 피치를 맞추기가 어려워진 것도 이유가 될것이다.
4. 솔로 활동


퀸의 골수팬이 아니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프레디는 퀸과 별개로 솔로 앨범도 두 장이나 냈었다. 퀸 활동의 휴식기였던 1985년에 Mr. Bad Guy란 앨범과 1987년경 유명 소프라노인 스페인의 몽셰라 카바예와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기념해서 만든 ‘Barcelona’ 활동을 했었다. 그리고 1987년에는 솔로 싱글 <The Great Pretender>을 커버하기도 했다.
Mr.Bad Guy 앨범에서는 기존 퀸에서 보여주었던 다양한 실험적인 록 음악보다는 철저히 프레디 머큐리 본인의 취향이 담긴 음악들을 수록했다. 당시 유행했던 디스코,오페라, 팝, 모던락 등 퀸의 음악과는 확연히 다른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바르셀로나’ 앨범은 그가 좋아했던 성악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앨범으로 하나의 클래식 앨범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풍부하고 다양한 프레디의 고음역대의 발성을 마음껏 들을 수 있다. 다만 후에 그가 에이즈로 사망했다는 이유로 바르셀로나 올림픽 공식 응원가에서 탈락된 점은 안타까운 점이라 할 수 있겠다.
‘The Great Pretender’에선 70년대로 돌아간 느낌이 난다. 퀸의 예전 뮤직비디오에서의 장면을 가져와 콧수염이 있던 뮤비에서도 밀은 채 다시 찍었다. 또한 여장을 했는데 자신은 물론이고 친구인 로저 테일러와 피터 스트라커도 함께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레디의 솔로 활동이 다시 알려진 건 이 시기 활동이 매우 왜곡된 전기영화 때문이다.
5. 말년, 그리고
Inside my heart is breaking,
내 마음은 부서지고,
My makeup may be flaking,
내 화장은 흩날리지만,
But my smile still stays on.
내 미소는 여전히 남아있지.
– ‘The Show Must Go On‘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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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5월 30일,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 뮤비 촬영 현장에서. |
말년에 에이즈로 고생하다 죽었는데, 1991년11월 23일 에이즈 감염을 공식 인정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그 다음 날인 11월 24일에 숨을 거뒀다. 당시 언론 보도
죽을 무렵엔 앞도 잘 안 보이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프레디는 1987년, 멤버들은 1988년에 이미 그의 에이즈 감염을 알았다고 한다. 그 즈음부터 프레디 머큐리는 급속히 초췌해지며 에이즈 감염설이 퍼지고 있었는데(당시 본인은 강력히 부인), 이때 프레디는 멤버들에게 ‘너희들도 내 문제가 뭔지 알고 있겠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얘기하고 싶지 않아. 난 그냥 죽을 때까지 음악을 했으면 좋겠어’라는 식으로 고백을 했다. 나머지 멤버들도 그의 뜻에 따라 더 이상 그 문제를 논하지 않고 음악 작업에만 몰두했다. 멤버들과 주변 사람들은 프레디를 보호해 주기 위해서 누군가가 물어보면 에이즈에 걸리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정확히 언제쯤에 에이즈에 걸렸는지는 모르지만 에이즈 전문가들과 주변 인물들은 1985년 라이브 에이드 이전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때부터 프레디가 몸에 이상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고, 공연 후에는 엄청 지쳐버리는 등 많이 힘들어했다고 한다. 아직까지도 프레디의 에이즈 감염 시기는 팬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인데 에이즈라는 질병 자체가 잠복기가 일정하지 않고 사람마다 면역 결핍 증상이 나타나는 시기가 다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팬들이 추정하는 에이즈 감염 시기는 프레디가 1982년 미국에 놀러갔을 때, 혹은 Hot Space 앨범 이후 프레디가 잠시 음악에 열정을 잃고 밤놀이에 빠졌을 때, 아니면 더 올라가서 1970년대 말 미국에서 클럽에 드나들 때까지도 감염 시기를 넓게 잡는 의견이 있다. 프레디에게서 면역 결핍 증상이 나타난 시기로 계산을 해 보면 감염 시기는 1982년이나 1983년 사이가 유력하다고 한다. 그때는 많은 사람들이 당대의 사회적 시선 때문에 HIV 보균자 검사를 받는 것을 꺼려했는데 프레디 역시 그랬다. 하지만 동성애인인 짐 허튼과 일본 여행을 가기 전에 비밀리에 검사를 받았는데, 병원 측의 누군가가 정보를 흘렸는지 언론사 쪽에 프레디가 HIV 검사를 받았다는 소문이 바로 나버렸다.
물론 프레디 역시 인간인지라 에이즈 감염을 처음 선고받았을 때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의사가 처음으로 프레디에게 에이즈의 감염을 알려줬을 때 프레디는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눈물까지 보였다고 한다. 프레디의 마지막 순간의 이야기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Who Wants to Live Forever’에서 당시 상황을 재연했는데, 무척이나 싱크로율이 높은 재연배우가 에이즈 감염을 선고받았을 당시 프레디의 혼란스럽고 절망스러운 모습을 아주 잘 표현했다.
프레디는 파파라치들 때문에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기 때문에 파파라치들을 따돌리기 위해 자신의 차량에 마네킹을 분장시켜서 시선을 따돌린 후 자신은 나중에 다른 차량으로 나가는 등 많은 고생을 했다. 그래서 결국 런던의 집을 떠나 다른 곳에서 지내기 시작한다(이 때 스위스 몽트뢰에서 체류한 기간이 늘어난 것 같다.).
프레디가 병에 걸림으로써 1986년을 기점으로 퀸은 라이브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프레디는 매직 투어 이후로 병색이 짙어졌으나, 1988년경까지 솔로곡으로 라이브를 계속했다. Barcelona를 몽셰라 카바예와 함께 라이브를 했었다. 즉, 1989년 The Miracle 앨범이 발매될 당시에 프레디가 라이브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안 됐었던 것은 맞으나, 1986년 이후 프레디가 어떤 라이브도 일체 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병색이 짙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프레디는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로 약을 먹어가며 악착같이 버텨내고 몸이 잠깐 좋아지면 그때 다시 작곡하고 노래하기를 반복했다. 프레디의 생전 마지막 퀸 정규 앨범인 Innuendo는 프레디가 언제쯤 스튜디오에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멤버들에게 연락하면 나머지 세 멤버들이 데모 버전을 미리 만들어 놓고, 프레디는 컨디션이 좋을 때 스튜디오에 와서 보컬을 녹음하는 방식으로 앨범을 만들었다. 생전 마지막 싱글인 The Show Must Go On은 음이 높아서 브라이언 메이는 프레디가 이 곡을 부를 수 있을지 걱정했다고 하는데, 프레디는 “I’ll fuckin’ do it, darling”이라고 내뱉은 후, 투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독한 보드카를 쭉 들이키더니 삑사리 없이 한 큐에 녹음을 마쳤다고 한다.
얼마나 마르고 초췌해졌는지 1991년 2월에 촬영한 <I’m Going Slightly Mad> 뮤직 비디오를 보면 두꺼운 화장으로도 병색을 감추기 힘들 정도. 콧수염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움푹 패인 두 볼이 팬들을 안쓰럽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유쾌한 분위기와 멤버들의 코믹한 표정 연기가 인상적인 뮤비.
프레디는 건강이 허락할 수 있을 때까지 음악 작업을 했고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했다. 죽기 직전에 찍은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의 뮤직비디오도 원래 애니메이션으로 대체하려고 했는데, 프레디가 고집을 부려서 멤버들과 함께 출연하는 평범한 내용으로 바꿨다. 그래서 퀸의 80년대 후반 뮤직비디오들을 보면 시간이 지날 때마다 프레디가 점점 병색이 완연해지고 초췌해지는게 보인다. 프레디는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죽기 전날까지 부인했지만, 되려 뮤직비디오가 에이즈 감염설이 널리 퍼지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프레디 머큐리는 죽기 전 근 1년 간 언론에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더 이상 치료가 의미 없음을 알게 되자 스스로 치료를 거부했다. 그리고 실제로 당시에는 에이즈라는 병이 발견된 지 십여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생명을 연장하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이 전무했다.
프레디가 면역 결핍으로 죽어가고 있을 때 그의 곁에는 그의 애인이자 이발사였던 짐 허튼이 함께 있었고, 그는 프레디의 임종까지 곁에서 지켰다. 당시 짐도 1990년에 받았던 에이즈 검사에서 양성 판정을 받았지만 프레디에게 1년 간 그 사실을 숨겨왔다고(짐 허튼은 2010년에 죽었다). 프레디가 죽어가고 있을 때 그의 절친이었던 가수 엘튼 존이 자주 병문안을 왔었다고 한다. 프레디의 병문안은 허락을 받은 몇 사람만 할 수 있었고, 엘튼은 그 중 한 명이었다. 프레디와 엘튼 사이의 우정을 알 수 있는 부분.
프레디는 죽기 직전 그나마 몸이 괜찮을 때 그림을 상당수 그렸다고 한다. 저택에 틀어박혀 에이즈로 고통받고 있을 때 텔레비전에서 무슨무슨 그림이 비싼 가격에 팔렸다는 뉴스가 나오자 프레디는 내가 해도 저 정도 보단 잘하겠네.라면서 그 자리에서 그림을 몇 점 그렸다고. 그 이후에도 디자인을 공부했던 대학 시절 경험을 살려 그림을 몇 점 더 그렸고, 프레디는 자조 섞인 목소리로 애인인 짐 허튼에게 ‘이거 내가 죽고 나면 무지 비싸게 팔릴 거야.’라고 농담처럼 말했었다고 한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밝게 여생을 보내려 노력했지만 슬프게도 결국 1991년11월 24일 프레디 머큐리는 스스로 일어날 힘조차 잃어버린 채 그의 비서에게 에이즈에 걸렸음을 인정하는 공식 성명을 발표하게 하고 채 24시간이 안 돼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고는 전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처음에 세계 언론은 앞다투어 에이즈를 부각하며 프레디가 이 병에 걸렸다고 기사를 썼지만, 곧 그 내용은 다시 프레디가 죽었다는 기사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의 사망 기사는 전 세계 언론에서 톱기사로 다루어졌다. 그러나 한국에선 몇몇 언론에서 짧게보도되거나 늦게 언급되었다.

세계를 흔들었던 가수가 세상을 떠나자 멤버들은 에이즈 모금행사 겸 프레디 추모 공연을 개최하는데 이 콘서트에는 엘튼 존, 메탈리카, 데프 레파드, 액슬 로즈, 로버트 플랜트, 조지 마이클, 데이빗 보위 등 당대 슈퍼스타들이 총출동했다. 그리고 멤버들은 그의 유작을 모아 발매하고 죽음을 애도하며 ‘No One but You’를 작곡한다. 그리고 이 곡을 끝으로 그의 친구이자 멤버였던 존 디콘은 1997년, 은퇴를 선언한다.
독실한 조로아스터교 신자였던 프레디의 부모님은 프레디를 조장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현대 문명에 조장이라는 풍습은 거부감이 많이 들 수밖에 없었고, 또 프레디 또한 종교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세속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디콘, 메이 등 퀸 맴버들과 지인들이 강력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결국 프레디는 화장되었고 재는 대중이 알지 못하는 곳에 뿌려졌기 때문에 그의 무덤은 없다고 알려졌었다.
하지만 지난 2013년 영국 언론들에 의해 프레디의 묘지로 추정되는 묘비가 런던 켄살 그린 묘지에서 발견되었다. 이 묘비에는 프레디 머큐리가 아닌 프레디의 본명인 ‘파로크 불사라’라고 기재 되어있으며 프레디의 출생년도와 사망연도가 똑같이 기재되어 있다. 프레디의 최후에 대해 알고 있는 연인 메리 오스틴과 퀸 멤버들은 이 묘지가 발견된 뒤 진위여부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고 있지만 대다수 팬들은 유년기를 제외하고 프레디가 평생 살았던 런던에 묻힌 것이 맞을 거라는 결론을 내리며 추모 발걸음을 이어가고 있다. 이 묘비에는 오늘도 팬들의 헌화가 가득하다.
6. 재능
록 음악 역사상 최고의 먼치킨, 보컬부터 작곡까지 모든면에서 최고를 달렸던 불세출의 천재, 록 음악의 신으로 평가받는다.
6.1. 가수로서
폭발적인 가창력의 소유자이자 록 음악 역사상 최고의 보컬리스트 중 한 명이다. 무엇보다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프레디 머큐리가 록 음악의 역사에서 가장 폭넓은 소화능력을 보유한 보컬이라는 사실이다. 당연히 기라성 같은 재능의 소유자들이 즐비한 록 음악사에는 ‘프레디보다 강렬한 고음을 자랑하는 보컬’도 있고 특정 스타일에 천착하는 ‘전문성이 프레디보다 투철한 보컬’도 있었다. 하지만 프레디 머큐리처럼 다양한 음악 장르(발라드, 오페라틱, 소울, 디스코 등)의 감성을 록의 영역 안으로 끌고 들어와 자연스럽게 소화해낸 보컬은 그 외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퀸의 음악이 당대의 전문가들에게 ‘슈퍼마켓 음악’이라고 폄하당한 것도 역설적으로 이런 다양함에 있었는데, 이토록 폭넓은 퀸의 음악 세계를 이음매나 빈틈 없이 완전무결한 형태로 표현해낸 프레디 머큐리의 다채로운 보컬은 그야말로 불세출의 경지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초에 쿵쿵따 드럼 소리뿐인 We Will Rock You나 기타 사운드 거의 없이 베이스 리프로 진행되는 Another One Bites the Dust와 같은 곡을 빈틈없이 완벽한 노래로 만들었던 건 프레디의 보컬과 라임,리듬 감각 없이는 불가능했다.
보컬로서 역량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20대 초의 대학 시절부터였다. 단 그때에는 천하의 프레디 머큐리도 실력이 다듬어지기 전이라, 목소리 기복이 심하고 다소 거친 면을 보였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무척이나 예쁜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목소리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라고. 그 뒤로 혼자 엄청나게 연습을 했는지 퀸이 결성될 즈음에는 이미 테크닉적으로 거의 안정된 보컬이었다.
프레디 머큐리는 어릴 적 합창부 시절을 제외하고 누군가에게 정식으로 노래를 배운 적이 없었다. 그래서 보컬 부분에서 누구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불분명하다. 가끔씩 맑은 가성으로 성량이 풍부한 오페라적 창법을 보여주기도 한다.
프레디 머큐리는 젊을 적에 엄청난 미성이었다가, 나이가 들자 창법을 바꾸어 그 특성을 많이 잃은 케이스이다. 성대 질환이 생기고 담배를 피워 피치가 조금 떨어지고 음색이 변한 감이 있지만 그보단 창법의 변화로 내츄럴 보이스를 내지 않고 먹는 소리를 사용하게 된 것이 차이점을 도드라지게 한 이유이다. 주로 연대별로 그 차이가 크게 드러나는데, 70년대 보컬은 성구전환을 정석적으로 조심스럽게 하되, 성대가 최대한 벌어지지 않게 노력한 상태에서 고음이 되면 후두가 크게 올라가는 형식의 벨팅창법을 주로 사용한 반면에 , 80년대에 들어서는 전체적으로 인골라에 빠져서 노래했고 성대가 벌어지고 갈라지는 탁성을 주로 썼다. 소리도 조심스럽게 가리던 취향에서 가성이든 쥐어짜는 탁성이든 되는 대로 뽑아내는 스타일로 바뀌었다. 사실 프레디 머큐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나 목소리는 다수가 1980년대 스타일이다. 초창기 앨범, 퀸 1집을 들어보면 멜로디가 재미없어도 프레디의 미성 덕분에 들어볼 만한 곡이 몇 곡 있을 정도이다. 미성이었던 시절에는 그야말로 굉장히 중성적인, 야누스적인 미성이었다. 남성의 목소리와 여성의 목소리가 혼재된 듯한 그 마성의 목소리는 지금도 경탄의 대상.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 전성기는 1980년도 초반이다. 하지만 1982년도 후반으로 접어 들수록 계속되는 공연으로 점점 목상태가 안 좋아지기 시작했고 프레디의 지속적인 흡연으로 인해 목소리가 두터워지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발매한 Hot space 앨범이 실패했으며 1983년도에는 아예 공연을 하지 않고 휴식기를 가졌다. 1984년도에 The Works 앨범과 함께 다시 투어를 했으나 이 시기는 프레디의 컨디션 기복이 엄청나게 심했던 시기였다. 목 상태는 지난 투어로 인해 나빠져 있었고 흡연으로 목소리도 두터워져 본 고장 런던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눈물 날 정도로 삑사리를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변화된 목소리에 적응된 프레디는 컨디션이 좋았던 날에는 두터워진 목소리로 고음을 지르는데 전성기만큼 올라가는 건 아니지만 오히려 그 두터운 고음이 전성기 고음보다 매력 있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1984년도 마지막 공연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반투스탄들 중의 하나인 보푸사츠와나의 썬 씨티에서 가졌는데 변화된 목소리에 완벽히 적응된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총 9일간의 공연 에서 10월 19일 공연에서 프레디는 보헤미안 랩소디를 Live Aid급으로 불러냈다.
1985년도는 브라질 리우에서 역대급 관중을 데리고 공연을 했는데 이는 유로 공연 최다 관중 콘서트로 알려져 있다. 이 때 첫째날 콘서트에서는 그 어렵다는 Somebody to Love를 전성기급으로 불러냈다. 일본에서 가진 콘서트에서도 Bb4 고음을 5초 동안 흔들림 없이 부르는 등 멋진 모습을 보여줬다.그리고 찾아온 Live Aid에서는 2옥타브 후반대의 고음을 너무나도 편한 표정으로 내지르며 역대급 무대를 생중계로 보여주어 퀸의 전성기를 다시 한 번 이끌었다. 전성기를 다시 연 후 1986년도에 가진 MAGIC 투어는 전반적으로 그리 좋았던 컨디션은 아니였지만 엄청난 관객을 동원하며 관객들과 함께하는 공연들은 명장면을 연출한다. 이렇듯 프레디는 전문적인 보컬 수업은 받은 적이 없지만 아름답고 매력적인 목소리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나이를 먹고 계속되는 투어로 1980년대 중, 후반의 공연에서는 목을 좀 사리는 모습이 종종 보이지만 노래를 잘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라이브에서는 3옥타브 대의 진성 고음을 잘 보여주진 않지만, 가성 고음은 의외로 많은 편이다. 3옥타브 후반대~4옥타브 초반대의 고음을 자유자재로 낼 수 있다. 로버트 플랜트의 가성이 날카롭다면, 프레디 머큐리의 가성은 굉장히 부드러운 느낌.
성대가 유난히도 약한 데다가 정식적으로 보컬 수업을 배운 적이 없어서 라이브 기복이 있는 편. 다만 프레디 머큐리의 성대가 약했다는 부분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프레디 머큐리는 라이브에서 순간적으로 성대근육을 조으고 타고난 체력을 바탕으로 호흡을 폭발시켜 벤딩없이 피치를 높이는 창법을 자주 사용했는데, 이는 음성학이 발달하고 보컬트레이닝이 보편화된 지금은 절대 권장되는 창법이 아니다. 일반인은 비슷하게 따라하기도 힘들며 숙련된 보컬리스트도 몇곡 부르고 나가 떨어질정도로 목에 무리가 간다. 그런데 프레디 머큐리는 이런 창법으로 거의 대부분의 곡을 소화하며 끝까지 기복없이 공연을 마친 사례가 다수 존재했다. 프레디의 성대가 유난히 약했다기보다는 다른 가수에 비해 성대에 무리가 가는 창법을 써야하다보니 기복이 심해질 수 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프레디 머큐리가 음악활동을 하던 70-80년대에는 컴퓨터 기술이 그렇게 발전했던 때가 아니고, 이를 감안하면 스튜디오에서 그의 가창력은 왜 그가 락 역사상 최고로 불리는지를 느낄 수 있는데, 라이브에서는 안 나오는 고음을 마구 난사하기도 하고, 저음도 굉장히 안정적이며, 발음도 정확하다.
자신을 포함한 퀸 멤버들 모두의 곡을 앨범에 싣다보니 장르도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부족함이 없다. 발라드, 디스코, 성악 등 장르70년대에는 미성 위주였지만, 70년대 후반부터 탁성까지 쓰면서 80년대 중후반부터는 미성과 탁성을 자유자재로 쓴다. 가성도 자유자재로 쓸 줄 아는데, 아름다운 가성을 보여줄 때가 있는가 하면, 이게 샤우팅인지 뭔지 분간이 안가는 괴성을 보여줄 때도 있는데, 이게 다 곡에 있어서 어색함이 없다.
1990년대 들어가면서 다시 1970년대 창법으로 돌아갔다. 아니, 1970년대보다 더 가볍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돌아갔다.
소리가 가벼워져 소리가 명료하게 들린다,
퀸의 곡은 그렇게 어려운 곡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막상 약 2~3시간 진행된 프레디 머큐리를 추모하기 위한 콘서트에서 많은 유명 가수들이 퀸의 곡을 불렀지만, 원곡만큼 해냈다고 평가받는 무대는 조지 마이클의 Somebody to love, 씰(Seal)이 부른 Who Wants To Live Forever, 익스트림의 퀸 메들리 정도 뿐이다.
원래 성부가 테너라고 많이 알려져 있었으나, 바리톤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실제로 같이 작업한 적이 있던 몽셰라 카바예는 이를 간파하고 프레디에게 “당신의 성부는 바리톤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니 굳이 고음을 부르지는 말아요. 고음역대는 소프라노인 내가 할게요.”라고 했고, 이에 프레디는 “하지만 테너가 아닌 바리톤 성부로 부르면 사람들이 저인지 모를 것 같아요…”라고 걱정했다고 한다.
프레디 머큐리의 진성 음역대는 0옥타브 파(F2)에서 3옥타브 파(F5), 가성 음역대는 4옥타브 라(A6)까지 선보인 적이 있다. 곡 중에서는 아니지만 0옥타브 도♯(C♯2)까지 내린 적도 있다. 한 인터뷰에서 로저가 말하길, “난 프레디의 최고음을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80년대에 낸 솔로 싱글에는 자신의 음역을 과시하는 Exercises In Free Love란 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노래에서는 그야말로 여성과 남성의 음역을 넘나드는 마성의 음역을 보여준다. 최고음은 3옥타브 파(F5). 여성의 두성을 구사했다.
6.2. 프런트맨으로서
Did rock and roll ever have a better showman than Freddie Mercury?
(락앤롤 역사에 프레디 머큐리를 능가하는 쇼맨이 있었는가?)
빌보드, The 25 Best Rock Frontmen of All Time(공연에서) 관객들의 열광이 시작돼도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다. 프레디 머큐리처럼 관객들이 바치는 애정과 숭배를 사랑하고 즐길 수가 없었다. 무대에서 관객의 열렬한 반응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존경스러우면서도 질투가 나는 일이다.
커트 코베인, 자살 전에 쓴 유서中.세상에 나타난 모든 프론트맨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은 프레디 머큐리가 분명하다. 그의 음역대, 카리스마, 존재감 그 모든 것이 프론트맨 그 자체였다.
디스터브드 데이비드 드레이먼, 플래닛 록과의 인터뷰 중에서 #
락 역사상 최고의 프론트맨이며 퀸이 역사상 최고의 라이브 밴드 가운데 하나라는 평을 받는데는 프레디의 무대 장악력이 가장 큰 기여를 했다. 그는 특유의 연극적이고 화려한 동작들과 관객 유도스킬을 바탕으로 퀸이 수만의 관객을 아우르는 스태디엄 공연을 해나가는 데에 매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프레디 머큐리의 무대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연은 1985년 라이브 에이드로, 그는 전세계의 내로라하는 뮤지션들이 총출동한 자리에서 최고의 퍼포먼스로 단연 두각을 드러냈다. 기획자인 밥 겔도프는 ‘그날 공연한 밴드 중에서 그냥 퀸이 최고였다’라고 평했고, 같은 공연에 출연한 엘튼 존이 퀸의 공연 후 백스테이지에서 ‘우라질! 니들이 공연 전세냈냐(you stole the show)!’ 라고 항의 아닌 항의를 했다. 당시 라이브 에이드 공연 특성상 모든 아티스트에게 20분의 시간만 주어졌고 퀸의 콘서트에 평소 사용하는 조명, 특수효과 장치 같은 것은 전혀 쓸 수 없었기에, 이 날의 공연은 오직 프론트맨인 프레디가 나대는 것으로 관객들을 매료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당시 U2나 듀란 듀란과 같은 신진 세력들에 밀려 슬슬 동력이 떨어진 듯 보이던 퀸을 다시금 정상으로 올려놓은 공연이었다.
한편 프레디의 트레이드마크 중 하나인 받침대 없는 마이크는 무대 위에서 지휘봉이나 에어 기타 등등 다양한 용도로 쓰이며 퍼포먼스에 볼거리를 더해주었다.
오늘날 그를 존경하는 많은 후배 뮤지션들은 그 열정적인 무대 매너를 존경의 요인으로 뽑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라이브 에이드 공연은 그 임팩트 때문에 대형 공연의 교과서처럼 여러 뮤지션들에게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 퀸에 뒤늦게 빠진 팬들은 무대에서 마치 거인과 같은, 강렬한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다.
프레디가 그처럼 인상적인 무대 매너와 쇼맨쉽을 보일 수 있었던 건, 단지 퍼포먼스 면에서의 기교와 재능 때문만이 아니라 관객의 환호를 이끌어내는걸 좋아하고 그들과 같이 호흡하는 걸 즐길 줄 아는 타고난 무대체질이었다는 점이 근본적인 요인이었다. 뛰어난 록 뮤지션이라 해서 모두가 청중앞에서의 공연을 좋아하는 무대체질인 건 아니다. 프레디와는 정반대로, 관객들의 열렬한 환호를 오히려 부담스러워 하고 많은 청중 앞에서의 공연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록 보컬리스트의 대표적인 예로 커트 코베인이 있다. 그는 유서에서 자기는 프레디 머큐리처럼 공연에서 관객들의 열렬한 반응을 즐길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즐기는 것처럼 연기하며 사람들을 속이는 것도 싫으니 어찌하면 좋냐는 내용의 비통함을 적어 놓기도 하였다.
<Queen의 Under Pressure >
공연 중간에 목을 풀 겸 독특한 소리를 내며 관중들과 호흡하는 것으로 유명하다.(위 영상의 0:26~2:15초 부분 참조) 이 관중 조련은 그가 죽은 이후에도 계속돼, 추모공연이나 2012 런던 올림픽 폐막식 등에서 스크린에 나온 그의 생전 공연 음성을 관객들이 따라부르는 장면을 연출했다. 참조 0:00~1:15
6.3. 작곡가로서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선율을 마음대로 만들어 낼까 감탄하게 만드는 천재 작곡가로, 퀸 결성 때부터 브라이언 메이와 더불어 많은 곡을 작곡했으며, <Bohemian Rhapsody>나 <Don’t Stop Me Now>,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99], <We Are The Champions>, <Somebody to Love>, <Killer Queen>[100], <I Was Born to Love You> 등 퀸의 수많은 대표곡들이 프레디의 작품이다. 위 노래들은 현재 한국에서도 아직까지 광고 음악이나 예능 프로그램 배경 음악으로 잘 쓰이고 있다. 노래 제목은 몰라도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은 프레디 머큐리가 작곡한 음악 최소 한두 곡은 알고 있을 정도다.
다양한 장르의 시도 및 혼합이 송라이터로서의 프레디 머큐리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로, 퀸 초창기(1, 2집)에는 보통 알려진 퀸과 프레디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헤비락 작곡에 치중했고, 그 이후 각종 발라드를 통해 피아노 발라드 스페셜리스트로도 자리매김했다. 그 외에도 프로그레시브 락, 가스펠, 팝, 디스코, 로커빌리, 오페라 등 다양한 음악을 시도했다. 디스코 쪽은 기존의 퀸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었던 <Hot Space>나 본인의 솔로앨범(<Mr. Bad Guy>)에서 두드러진다.
대중적이고 기억하기 쉬운 멜로디를 뽑아내는 솜씨 또한 아주 일품이며, 그러면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대중음악에 비해 특이한 전개, 수 차례의 조바꿈 등 복잡한 구성을 음악에 녹여내곤 했다(대표적으로 Bohemian Rhapsody, Bicycle Race와 Queen II에 수록된 곡들). 반면 그 자신은 악보를 거의 볼 줄 모른다고 말했다. 퀸 멤버 및 관계자들의 말에 의하면 프레디는 자신이 만든 곡을 일반적인 악보 형식이 아닌 그만이 알아볼 수 있을 법한 이상한 기호로 종이 여러 장에 적어 스튜디오에 가져왔다고. 대부분의 노래는 피아노로 작곡했는데, 작곡하는 것도 좀 특이한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피아노 앞에 앉아 머리를 싸매거나 고뇌하는 게 아니라, 멜로디가 떠오르면 녹음하지 않고 머릿속에 넣어둔 후 나중에도 그 선율이 남아있으면 그제야 녹음하고 작곡을 시작한다고. 선율이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는 건 그 선율이 허접해서 기억할 가치가 없어서라고 한다.
작곡가로선 70년대 중후반기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80년대엔 밤놀이에 빠져서 음악 작업에 매우 소홀해졌고, 게이클럽의 음악에 영향받은 가벼운 댄스음악으로 일관하다 보니 70년대 곡들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가 많았다. 하지만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80년대 후반기부터 다시 창작열을 불태워 <Barcelona>나 <Innuendo> 같은 명곡들을 써낸 거 보면 마지막까지 재능은 어디 가지 않은 모양이다.
본인이 작곡을 하고 나서도 로저나 존이 작곡을 할 때면 으레 곁에서 기꺼이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다만 브라이언은 본인만의 확고한 작곡과 연관된 신념과 방식이 있어서 프레디의 도움이 굳이 필요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서로 같이 의견을 통일시키려고 하다 보면 꼭 싸움이 터졌다고 한다.
6.4. 연주자로서
퀸에서 리드보컬 포지션 외에 피아니스트로도 활약했는데, 정확한 리듬감이 그의 연주에서 보여지는 차별적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브라이언 메이에 따르면 프레디 머큐리가 작곡 후 녹음을 할 때 피아노 연주를 처음 깔고 시작하는데 메트로놈도 없이 그냥 자기 맘대로 한큐에 녹음하는데 그 박자가 메트로놈을 놓고 친 듯이 한 치도 틀리지 않고 정확해서 마치 드러머가 피아노를 치는 듯했다고 설명하였다.
건반악기로 신디사이저를 주로 활용하는 락밴드에서 그랜드 피아노는 그다지 흔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프레디는 그랜드 피아노의 사운드를 선호해서 스타인웨이앤드선스를 스튜디오나 공연에서 활용했다. 존 디콘이 You’re My Best Friend를 작곡했을 때 프레디에게 월리처 일렉트릭 피아노의 연주를 부탁했지만 프레디는 그랜드 피아노 놔두고 왜 그런 악기를 쓰냐고 거절해서 결국 디콘이 직접 연주해 녹음하기도 했다.
하지만 머큐리 본인은 스스로의 연주 실력은 그다지 맘에 들어하지 않았고 때문에 80년대 들어서부턴 본인이 직접 연주하는 대신 프레드 멘델, 마이크 모란과 같은 세션 뮤지션들을 적극 활용하게 되었다. 또한 후기 라이브에서도 피아노에 앉아있는 대신 무대를 돌아다니며 관객을 이끌어가는 방침을 택함에 따라 공연에서의 건반 연주도 라이브 한정 세션맨이었던 스파이크 에드니에게 거의 떠넘겨지다시피 하게 되었다.


악기는 주로 피아노를 다뤘지만 기타도 쳤다.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때만 연주하는데 공연 때 코드는 3개밖에 칠 줄 모른다고 했지만 실제론 6개를 친다.[108][109] 참고로 82년 Hot Space 투어까진 12현 통기타로 연주했으나, 84년 The Works 투어부터 펜더 텔레캐스터로 변경했다. 기타 실력은 본인 스스로 밝혔듯이 수준급과는 거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브라이언 메이의 말에 따르면, 프레디가 머릿속에서 떠오른 기타 아이디어를 그에게 설명할 때 기타를 붙잡고 안되는 연주를 시도하다가 피아노로 뛰어가곤 했다고 전해진다.
7. 잡다한 이야기

왼쪽부터 마이클 잭슨, 프레디 머큐리, 존 디콘
-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과 친분이 있어서 여러 번 조우했다. 마이클이 프레디의 팬임을 자처해서 80~82년 퀸의 공연에 여러 차례 찾아오기도 했다. 참조 같이 세 곡[114]을 작업하기도 했으나 스케줄 조정에 실패하여 생전에 완성곡이 발매되지는 않았다. 마이클 잭슨이 녹음 스튜디오에 애완 라마를 계속 데려와서라고 카더라[115]이후 두 사람은 소원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프레디는 인터뷰를 통해 마이클 잭슨이 ‘Thriller’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이후 매우 바빠졌고 프레디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조금 소원해졌다고 말했다. 프레디의 퍼스널 어시스턴트였던 피터 프리스톤에 의하면 프레디도 마이클에게 경외심을 가졌을 정도로 마이클을 좋아했다고 한다. 퀸 결성 전부터 이미 하드록을 좋아하는 룸메이트들에게 잭슨 파이브의 ‘I Want You Back’의 굉장함을 소리 높여 설명했다고.. 한편 ‘Another One Bites The Dust’가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달성하는 데에 마이클 잭슨의 조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로저 테일러가 밝힌 바에 의하면 본래 퀸은 해당곡의 히트 가능성을 낮게 보며 싱글 발매 계획을 세우지 않았으나 마이클 잭슨이 반드시 크게 히트할 것이라고 자신들을 설득하여 결국 내놓게 된 것이라고 한다.
- 밴드가 성공궤도에 오르면서 멤버들끼리 자잘한 트러블도 잦았는데, 그중에서 프레디는 브라이언 메이와 제일 마찰이 잦았다고 한다. 프레디와 브라이언이 싸우는 방식은 좀 웃겼다고 전해진다. 프레디와 브라이언이 사소한 말다툼으로 시작해서 점점 서로 목소리가 커지다가 브라이언이 냉소적으로 프레디가 상처받을만한 말을 하면 프레디는 빡쳐서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그러다가 몇시간 뒤에 다시 프레디가 돌아와서 어영부영 화해를 하고 다시 하던 일에 집중했다고 하는데, 그렇게 싸우고 있으면 주위 대부분의 반응이 ‘브라이언이 심한 말 할만 했네’였다고. 프레디가 주위 사람들이 납득하지 못하게 감정적으로 화냈던 적이 많았던 걸로 여겨진다.
- 1977년에 퀸이 Wessex 스튜디오에서 We Will Rock You 녹음을 하고 있을때 펑크 록 밴드 섹스 피스톨즈의 시드 비셔스가 프레디에게 시비를 건 적이 있다. 화려한 음악 스타일과 대중적 성공을 거둔 스타밴드들을 싫어했던 펑크 록 밴드 섹스 피스톨즈에서 베이스를 담당했던 시드 비셔스에게 톱스타 프레디 머큐리가 좋게 보일 리는 없었을듯. 스튜디오에서 프레디와 마주친 시드 비셔스는 “어이. 네가 관객들 앞에서 발레나 춰야하는 프레디라는 놈이군” 이라며 괜히 시비를 걸었는데, 프레디는 “이봐, 사나운 친구여. 우리는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라네.“라고 말하며 유들유들하게 넘어갔다.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드는 또라이같은 시드 비셔스의 성격상, 만약 프레디가 그때 공격적으로 응수했다면 폭력적인 상황으로 악화될 수도 있었는데, 프레디가 굳이 같은 수준으로 맞대응하기보단 부드럽게 넘긴 것. 퀸과 섹스피스톨즈는 애초부터 서로 추구하는 음악성이 완전히 다른데다가, 섹피 멤버들과 달리 퀸 멤버들은 영국 중산층 집안 출신이었고, 다들 대학도 나온 사람들이다. 전형적인 영국 뒷골목 양아치 스타일이였던 섹스 피스톨즈 멤버들 눈에 퀸은 완전히 대척점에 서 있는 밴드였으니 좋게 보였을 리가 만무하다.
- 세간엔 게이나 양성애자라고 알려져 있지만 본인은 정확히 밝힌 적이 없다. 다수의 팬들이나 언론들은 그의 연애경력을 보아 그냥 양성애자라고 흔히들 보고 있는 듯하다. 프레디 머큐리는 대학의 명물이었고 그의 성적 지향을 친구들 대부분이 알고 있었다고 한다. 잔지바르에서 태어난 특이한 인종의 그가 화려한 옷과 장신구를 걸치고 다니며, 매일같이 깔깔거리며 웃고 ‘달링’ 같은 말들을 남자들에게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다녔으니 눈치 못 채는 사람이 이상했을지도. 대학에 다닐 때는 무척 화려하고 밝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 언론이나 외부에 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개인사를 밝히는 걸 극도로 꺼려했다. 원래 언론과 친한 상황도 아니었거니와 프레디 본인이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는 성격이었던 걸로 전해진다. 특히 성적 지향 쪽은 주위에 밝히길 굉장히 꺼려했었으며, 평전에 의하면 죽을 때까지도 부모님에게까지 자신의 성적 지향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님이 프레디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같이 살고 있는 애인 짐에 대해 어떻게 둘러대야 할지 곤란해했다고….(물론 프레디의 부모님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대충은 프레디의 성적 지향에 대해 눈치채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1987년 자신의 매니저 폴 프렌터가 더 선에 프레디의 사생활과 에이즈로 인해 전 애인이 죽었다는 것을 거액을 받고 팔아넘겼을 때 극도로 분노했으며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때 이후로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지도 않았다고 한다. 참고로 폴 프렌터 역시 프레디가 죽기 3달 전인 1991년 8월 에이즈로 인해 사망했다.
- 1970년대 브라이언와 메리 오스틴은 몇 번 데이트를 했는데 프레디가 메리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브라이언은 진지한 관계는 아니었던 메리를 수줍음이 많던 프레디에게 흔쾌히 소개해준다. 소개로 알게 된 여성 메리 오스틴과 사귀며 동거까지 하였으나 프레디가 다른 남성과 불륜을 가졌고 그 사실을 1976년 메리에게 알리며 헤어졌다. 그렇지만 메리와는 헤어지고 나서도 좋은 사이를 유지했고 프레디가 본인의 유일한 ‘친구’라며 깊이 신뢰했다. 프레디와 사귀던 애인들 중에 메리를 질투해서 그걸 항의하다가 프레디와 헤어진 사람들도 꽤 있을 정도. 프레디 역시 누구도 메리를 대신할 수 없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했고 가족 이상으로 신뢰하는 전 애인이자 친구였기 때문에 프레디가 죽고 나서 런던의 대저택을 상속받았다. A Night at the Opera에 실린 “Love of My Life”라는 유명한 발라드곡 역시 메리 오스틴에게 바치는 노래였다. 한 평전에 따르면 후일 1980년대 중반에는 오스트리아 출신 여배우 바바라 발렌틴과 잠시 사귀기도 했다.
- 프레디가 가장 오랫동안 애인 관계를 유지하며 동거했던 사람은 짐 허튼으로 1983년에 만나 사랑에 빠졌으며, 1985년부터 1991년 프레디가 죽을 때 까지 함께 했다. 그들의 관계는 대중에서 숨겨졌기 때문에 종종 프레디의 정원사 내지 이발사로 소개되었으나 투어마다 같이 따라 갔었다고 한다. 그 이외에 프레디 생일파티 영상에서도 자주 보인다. 프레디의 40세 생일 때 법적으로는 인정 못받았지만 부부의 연을 맺었고, 오른손 약지에 커플링을 끼기 시작하였다. 독일 방문 중엔 시장 한복판에서 짐 허튼 품으로 뛰어든 프레디 때문에 그는 잠시 주변을 살펴보며 식은 땀을 흘려야 했었다고. 짐은 1987년 프레디의 HIV 감염 사실을 알았으나 계속 함께했고 결국 그도 1990년에 HIV 감염사실을 알게되었지만 이미 투병생활로 피폐해진 프레디에게 그 사실을 숨겼다. 하지만 두번째 검사 결과는 프레디에게 알렸고 소파에 누워있던 프레디는 ‘The Bastards'(이 개자식들)라고 중얼거렸다고. 프레디는 짐 허튼에게 50만 달러의 상속을 남기고, 짐 허튼과 살고 있던 자신의 런던 대저택을 메리 오스틴에게 상속하며 짐 허튼이 집에 계속 머물 수 있도록 하였으나 그의 사망 이후 짐 허튼은 메리에 의해 강제로 집에서 쫓겨나야 했다. 짐 허튼은 2010년에 폐암으로 사망하였다. 참고로 짐 허튼은 1995년 자신과 프레디의 삶에 대한 회고록 <<Mercury and Me>>를 출판했다. 아무레도 프레디 머큐리를 우상화 하는 경향의 사람들이 읽기엔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부분이기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는 모양.
- 강렬한 콧수염과 독특한 무대 매너 때문에 굉장히 호쾌하고 터프했을 것처럼 보이지만 짐 허튼에 따르면 무척 수줍음이 많고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또한 굉장히 감성적이였다고. 한번은 크게 싸움을 하고 하루종일 침묵으로 일관하던 프레디에게 36개의 블루 문 장미를 가져다 주자 그제서야 마지못해 풀었다고 한다. 파파라치식으로 달려드는 언론을 피해 많은 연인들에게 의지하곤 했지만 배신도 많이 당하면서 상처를 많이 받았던 모양.
- 퀸의 드러머인 로저 테일러와 작은 옷, 장신구 가게를 하기도 했다. 어느 정도 생활비를 벌려고 여기저기 손을 써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프레디는 장사를 할 만한 타입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때의 일화가 있는데, 가게를 보던 도중 프레디 머큐리가 입던 재킷을 벽에 걸어놓았는데, 한 손님이 프레디의 재킷을 맘에 들어했다. 마침 프레디는 잠깐 외출 중이어서 로저만 있었는데 손님에 재킷을 맘에 들어하자 푼돈을 받고 그것을 팔아버렸다. 잠시 뒤에 돌아온 프레디는 로저가 자신의 재킷을 팔아버린 걸 알고 펄쩍 뛰면서 화를 냈고 직접 재킷을 되찾아왔다고 한다. 어쨌든 장사는 시원치 않았고, 오래 지나지 않아 가게를 접게 된다.
- 오페라와 발레 등 고전 예술 장르를 좋아했으며, 성악에도 관심이 많았다. 파바로티도 좋아했었다. 다큐 ‘프레디 머큐리, 가려진 삶’에 의하면 특히 프레디는 파바로티의 공연을 직접 듣고난 뒤 자신과 동행한 스태프에게 ‘세계 최고의 목소리를 들었다’라고 쉴새없이 흥분했었다고 한다. 또한 같은 다큐에서 언급하기를, 프레디가 바르셀로나가 발표될 당시에 파바로티는 이 곡이 ”오페라를 단순화시킨 곡”이라며 탐탁치않게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프레디 사후에는 이래저래 잘 풀린 모양인지 파바로티는 퀸 멤버들과 공연을 했었다(노래는 Too Much Love Will Kill You. 브라이언이 영어로 부르고 파바로티가 이탈리아어로 부름). 고음역대의 창법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이런 프레디의 취향은 그가 작곡한 노래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퀸 노래 중 뭔가 요상한 멜로디의 노래들이 들린다면 십중팔구 프레디가 만든 노래라고 봐도 좋다.
- 워낙 열정적이고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왠지 덩치가 큰 걸로 기억되지만, 실제로는 177cm로 그냥저냥한 수준이다. 하지만 전신 사진을 보면 상체와 다리의 비율이 3:7로 보일 정도로 다리가 매우 길어서 신장이 커보였다고한다. 더군다나 트레이드마크 수준으로 유명한 복장인 민소매와 하얀색 배바지를 입으면 기이할 정도로 다리가 더 길어보였다.
킬러 퀸을 부르는 프레디
- 메가쑈킹이 알타리라는 개인 사이트에서 영화 패러디 만화를 그리다가 기사 윌리엄에서 프레디 머큐리 사진을 입힌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내용을 그려 퀸 팬들에게 쌍욕을 들은 적이 있다. 윌리엄을 등 뒤에서 안고 싶어하는 공주가 나오는데 어찌 공주가 쓴 마스크가 벗겨지더니 드러난 얼굴이 바로 프레디 머큐리 얼굴을 덧입힌 것이었고 윌리엄이 분노하면서 창으로 힘껏 두들겨 패주며 끝나는 줄거리였다. 당시에도 프레디의 팬들이 불쾌해하며 이 만화에 악플을 달기도 했다. 사실 영화 기사 윌리엄에 그의 노래가 나온 점 때문에 들어간 우스개이긴 하지만 어쨋든 고인드립이니… 메가쑈킹 항목참조.
- 한국에서도 영챔프 기획으로 신인만화가들의 단편 형식 시리즈물에 단편으로 나온 적이 있다. 요정과 관련해서 퀸의 그룹명이 퀸이 되었던 얘기를 다루고 있다.(퀸의 명곡들이 사실은 그 요정과 프레디와의 조우로 인해서 만들어졌다는 식이다.) 참고로 여기 등장한 마녀는 프레디와 연인이 되려다 딱지맞고 돌아서 막장 타는 역, 말년의 프레디가 죽기 직전에 다시 등장해서 그를 보살핀다……라고 쓰여져 있으나 덧붙이자면 써니라는 이름의 마녀는 마녀들의 세계에서 인간세상을 체험하는 일종의 성인식에 참석했고 마녀는 마녀세계에 있을때부터 아름다운 목소리를 듣고 반해 프레디의 집에 찾아가지만 불시착하는 바람에 프레디의 창문을 거의 깨부순다. 그로 인해 집안일을 해준다든지 작곡 공부를 배운다든지 하는 식으로 프레디의 집에 얹혀 살게 되고 때때로 퀸 멤버들도 만나고 하다가 마녀는 스스로 작곡을 하게 된다. 그 노래가 바로 Love Of My Life 라는 설정이다. 마녀는 프레디를 사랑하고 있었고 그에게 바치는 선물로 그 노래를 준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연주해보라는 마녀의 권유에 따라 프레디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연주를 하지만 마녀는 순간 프레디 마음속에 떠오른 사람을 보고 경악하게 된다. 프레디가 연주를 끝내고 다른 멤버들은 명곡이라며 기뻐하고 프레디 역시 고맙다고 하지만 마녀는 혼자서 화난 듯한 표정으로 프레디를 쏘아보다가 “밴드 이름 아직 안 정했다고 했죠? 이건 어때요? Queen.” 이라고 추천해버린다. 물론 Queen 에는 동성애자의 뜻도 있기 때문인 것인 설정인 듯 하며 마녀가 밴드명으로 Queen을 추천하는 순간 프레디의 얼굴도 굳어지는 묘사가 나온다. 그날 밤에 써니는 프레디에게 화를 내다시피 하며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만 프레디는 받아들일 수 없었고 써니는 당신이 그럴리가(동성애자 일리가) 없잖아 라고 울부짖다 눈물을 흘리며 빗자루를 타고 작별인사를 하고 떠나간다. 그 후 오랜 시간이 흘렀고 프레디의 집, 병약한 프레디가 브라이언 메이에게 써니가 보고 싶다며 Love Of My Life의 연주를 부탁한다. 프레디는 곡을 감상하다가 눈앞에 빗자루를 타고 나타난 써니를 보며 이름을 되뇌이며 끝.
- 2011년 9월 5일에 탄생 65주년을 기념하는 구글 두들이 만들어졌다. 로고의 재생 버튼을 누르면 ‘Don’t stop me now’의 1절이 영상과 함께 나오며 영문 자막으로 가사도 함께 볼 수 있다.
- 튀어나온 입과 뻐드렁니에 대한 상당한 컴플렉스가 있어서 웃을 때도 입을 가리고 웃고 수염도 그것을 가리기 위한 일환으로 길렀다고 한다. 80년대 말엔 면도를 했는데 그때의 이후 The Miracle 앨범 뮤비에서는 아예 콧수염 뿐만 아니라 턱수염까지 길렀었다.
- 2012 런던 올림픽 폐막식에서 당당히 한 부분을 차지했다. 그의 생전 영상을 따라 관중들이 가락을 따라하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프레디 머큐리는 성악가 몽셰라 카바예와 함께 ‘Barcelona’라는 곡을 부른 적 있는데, 이 곡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주제가가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올림픽 전에 프레디 머큐리가 에이즈로 사망하자 올림픽 측에서는 에이즈로 죽은 사람의 노래를 주제가로 쓸 수가 없다며 호세 카레라스, 사라 브라이트만의 “Friends for Life”(영원한 친구)로 바꾸어 빈축을 샀다. BBC는 꿋꿋이 ‘Barcelona’를 틀었다. 이 점을 알고 폐막식의 장면을 보면 프레디 머큐리의 20년 묵은 한풀이 같다는 생각도 든다.
- 대단한 고양이 애호가였다고 한다.
- 퀸 평전에 따르면 진지바르 시절의 과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공연 직후 프레디의 동창들이 찾아왔는데 “죄송하지만 저는 귀하가 누군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잔지바르 시절이나 인도에서 유학하던 시절 이야기를 절대 스스로 입에 안담았을 뿐더러 본명도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퀸의 홍보담당으로 일했던 직원은 십 년 넘게 퀸의 멤버들과 같이 일했는데 프레디가 죽고 나서야 프레디의 본명이 파로크 불사라였다는 걸 알았다고. 상술했다시피 프레디는 퀸으로 데뷔하고 나서야 본인의 이름을 프레디 머큐리로 개명하는데, 대학시절에는 “프레디 불사라’라는 이름으로 그냥 썼다고 한다. 근데 동창들의 증언에 의하면 ‘불사라’라는 성을 밝히는 걸 매우 꺼려했다고 한다. 풀네임이 뭐냐고 물어보면 그냥 어물쩍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고.. 이쯤 되면 본인이 고향에서 지내던 시절이나 인도에서 지내던 그 시절을 그냥 흑역사라고 생각했던듯. 인도야 그러다쳐도 잔지바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건 1964년에 잔지바르의 아랍왕조가 흑인에 의해 뒤엎어지면서 아랍인들과 인도인들이 대거 재산을 몰수당하고 쫓겨났는데 프레디 머큐리의 가족들도 인도계였기 때문에 덩달아서 쫓겨났던 경험 때문이었다는게 정설, 그래서 그런지 시사인에 따르면 잔지바르에는 프레디 동상 하나 없고 추모열기도 거의 없다고한다. 몇몇 백인과 팬들만 생가터를 기웃거린다고.
- 일본의 대전격투액션게임 길티기어 시리즈의 주인공 솔 배드가이의 모티브가 되었다. 캐릭터 이름부터 프레디의 별명이고 이 캐릭터의 보물이 퀸의 시어 하트 어택앨범. 캐릭터 테마 ost는 퀸 1집의 수록곡 <keep your self alive>에서 제목을 따왔다.사실 락 음악 매니아인 프로듀서 영향 탓에 이 게임에 등장하는 전 캐릭터가 락음악,뮤지션과 연관이 있다.

- 스위스 몽트뢰에 있는 프레디 머큐리의 동상. 생전 프레디 머큐리는 몽트뢰를 자주 방문했다고 한다. 흔히 프레디 머큐리 하면 생각나는 A Kind of Magic 투어의 모습을 담아냈다. Made in Heaven의 앨범 자켓이기도 하다.
- 84년 9월 22일의 독일 하노버 공연에서는 Hammer To Fall을 부르던 중,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노래를 중단하고 관계자들의 부축으로 피아노에 겨우 앉은 뒤, Bohemian Rhapsody, We Will Rock You, We Are The Champions만을 부르고 공연을 중단해버렸다. 이때 브라이언이 당황하였는지 We Will Rock You의 기타 솔로 파트를 조금 더 일찍 연주해 버렸다. 이 당시 넘어지고 부축을 받는 사진이 남아있다.
- 라이브에서 고음을 조금씩 낮춰 부르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역대 최고를 다툴 음색과 목청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성대의 내구성을 약하게 타고난 데다 정석적인 트레이닝을 전혀 거치지 않은 프레디의 목소리는 투어 후반으로 갈수록, 또 커리어 후반으로 갈수록 쉽게 피로가 누적되고 빠르게 지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84년 전후로는 자기관리 역시 좋지 않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때문에 좋은 컨디션을 투어나 공연 내내 유지하는 데 무리가 오면서 점차 스스로 목을 사리게 된 것이지, 고음을 부르는 것 자체를 즐기지 않았던 가수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실제로 고음에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던 78년의 News of the World 투어와 최전성기인 79년의 Crazy 투어, 80년부터 82년 여름까지의 투어를 보면 프레디가 원곡에도 없는 고음 애드립들을 섞어가며 노래를 더 빡세게 불러대는 모습을 자주 관찰할 수 있다.
- 고음을 피하는 경향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곡은 발표 이후 대부분의 공연에서 마지막 곡으로 등장했던 We are the champions. 1절의 But I′ve come through(B♭4)는 컨디션이 좋지 않았을때도 성공할때가 있었지만, And we′ll keep on fighting till the end에서 fighting부분은 3옥타브 도(C5)로 라이브에선 대부분 2옥타브 솔(G4)에서 라(A4)까지만 올렸다. 그리고 하이라이트인 매 코러스마다 등장하는 “We are the champions, we are the champions(Bb4)!” 를 부를 때면 프레디는 한 옥타브 아래를, 드러머인 로저 테일러와 기타리스트인 브라이언 메이가 원음을 내는 경우가 많다. 코러스를 모두 원음으로 부른 라이브는 현존하는 음원들 중에서는 85년 라이브 에이드 하나뿐이다. 목을 험하게 사용하는 프레디의 가창방식상 마지막에 부르는 곡에 가장 취약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노래의 하이라이트이니만큼 팬 입장에서 상당히 아쉬운 대목임은 분명하다. # 일례로 컨디션이 좋기로 유명한 1981년의 몬트리올 라이브에서도 1분 즈음에 등장하는 해당 파트를 저음으로 깔아부르고 있다. 아무래도 같은 곡에서 등장하는 같은 높이(Bb4)의 다른 고음들을 무난하게 처리할 만큼 상태가 좋은 공연들에서도 한결같이 낮춰 부르기를 고수하는 것을 보면 못한다기보다 일부러 사린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팬들 입장에서는 아쉬운 부분. # 이름높은 라이브 에이드 공연에서는 목소리 최전성기가 살짝 지났고 목에 혹이 있어 컨디션이 좋지 못해 의사가 말렸음에도 짧은 공연시간과 투어 휴식기라는 이점을 살려 첫 코러스의 C5와 위에 언급한 3차례의 Bb4s 노트를 모두 불러낸 바 있다. 사실 두 번째와 마지막 코러스에서 약간의 음정 불안이 드러나긴 하는데, 이는 부틀렉의 사운드로 들을 때나 확연하지 방송에서는 로저테일러의 완벽한 고음 하모니에 거의 묻혀 버린다.
- 1984년부터 1986년까지의 투어생활 말년 동안에는 데미지의 누적과 약간 미흡한 자기관리로 인해 성부가 바리톤에 가깝게 내려갔고, 투어 초반이 지나면 고음이 점차 버거워져 로저 테일러의 도움을 자주 받곤 했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낮아진 성부로도 고음역이 대부분 커버되는 투어 초반의 공연들은 정말 귀가 즐겁다는 뜻도 된다다. 어쨌거나 라이브 에이드 공연의 경우 위에 서술한 것처럼 20분 남짓한 짧은 공연 시간과 The Works 투어를 마치고 가진 2달 가량의 휴식 덕에 당시 공연들의 평균치를 아득하게 뛰어넘는 화려한 퍼포먼스를 들려주지만, 대체로 당시, 특히 1984년도 9월 즈음의 콘서트들 중에는 커리어 최악의 기량을 선보인 적도 적지 않다. 다행히도 1985년으로 접어들면서 조금씩 목소리 관리에 신경을 기울인 것인지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하고, 1986년에 벌어진 A Kind of Magic 투어에서는 긴 셋리스트와 빡빡한 일정이라는 난관에도 오히려 투어 막판에 상태가 반등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기대 이상의 공연을 여럿 남기기도 했다.
- 다만 Live At Wembley 86′ 라이브 앨범과 DVD 영상은 매직투어 중 가장 상태가 나빴던 7월 초중순의 공연을 담고 있다. 게다가 이틀 연속 진행된 웸블리 공연에서 이미 첫날 많은 힘을 쓴 상태에서 훨씬 지친 모습의 2일차 공연을 베이스로 사용하게 된 것 또한 악재. 이 때문에 가끔씩 웸블리 공연에서 프레디가 의외의 파워풀한 고음을 내는 장면들은 대부분이 오버더빙의 힘을 빌어 연출된 것이다. 공연 후반에 보헤미안 랩소디를 부르고 나서는 목소리가 거의 나가버려서 이후의 곡들 중에서는 오버더빙이 들어가지 않은 곡이 오히려 드물다.이외에도 One Vision, A Kind of Magic, Who Wants to Live Forever 등에서 오버더빙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오버더빙 이전의 웸블리 공연은 이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해당 영상이 올라와 있는 채널은 퀸의 공연에 입문하는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만한 유명 퀸 부틀렉 전문 채널.
- 롭 헬포드가 그가 70년대 후반에 가죽옷을 입은 것을 보고 복장에 대해서 자기처럼 오토바이 대회에 나갈 생각은 없냐면서 깐 적이 있었는데, 네가 먼저 로열 발레단이랑 합동 공연하면 생각해보겠다고 응수한 적이 있다.그리고 그 말을 들은 롭은 프레디의 더 이상 가죽 의상에 태클을 걸지 않았다.
- 생전 일본에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정확히는 프레디 뿐만 아니라 퀸 멤버 전체가 일본에 상당히 호의적이었는데 3집 전까지 그리 큰 인기가 없었던 퀸을 영국을 제외한 유일하게 호의적이었던 나라가 바로 일본이었고 머나먼 이국의 자신들을 좋아해주는 그런 일본팬들의 마음에 감동 받아 6집 마지막 트랙을 Teo torriatte 라는 일본어 가사가 포함된 일본풍 노래를 넣어 팬들의 사랑을 감사로 보답했다. 또 훗날 1987년에는 La Japonaise 라는 일본어로 부르는 곡을 Barcelona 앨범에 넣기도 했고 애인인 짐 허튼과 일본여행도 자주 갔으며 1976년 일본 투어 때는 기모노를 입고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 2016년 3월 26일에 뜬금없이 S.H. 피규어아츠로 발매되었다. 그리고 2019년 08월 31일에 재판되었다. 가겨은 6480엔. 퀸의 마지막 투어였던 무대인 Live at Wembley Stadium에 등장했던 유명한 노란색 코스튬을 재현했으며 마이크 스탠드를 활용한 전신 풀가동의 액션 및 대담한 퍼포먼스의 재현이 가능하다. 또한 다수의 참고 자료로부터 디지털 채색기술 구사하여 여러가지 표정을 바꿀수있는 다수의 헤드도 부속되어 있다. #
- 2006년 타임지가 선정한 아시아의 영웅들 리스트에 선정된 적이 있다. 그가 인도계 영국인이란 걸 생각하면 잘못된 선정은 아니지만 약간 의아할 수도 있는 부분.
- 2018년에 개봉한 20세기 폭스에서 전기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제작했다. 라미 말렉이 머큐리를 분했다.
- 각 투어 때 마다 복장이 꽤나 달라지는데 1970년대 초중반에는 날개옷과 레오타드[를 입었고, 70년대 후반 뉴스 투어에서는 레오타드 위에 가죽옷을 걸치다가 5월 7일 영국 스태퍼드 공연어서부터 재즈 투어까지 멜빵에 가죽옷으로 통일되었다. 1979년 크레이지 투어에서는 재즈 투어와 다른 가죽 재킷에 가죽 바지, 빨간 넥타이와 무릎 보호대착용했다. 80년대 게임 투어에서는 크레이지 투어처럼 검은 가죽 재킷, 빨간 넥타이, 빨간 가죽바지에 파란 무릎 보호대를 차다가, 가죽 옷에서 조금씩 벗어나 나시티와 백바지를 입기도 했으며, 이는 82년도 스페이스 투어에서도 동일했다. 그리고 웍스 투어에서는 뭔가 레슬링복스러운 타이트한 트레이닝복을 입었고, 라이브 에이드에서는 흰 런닝셔츠와 색바랜 청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프레디의 마지막 투어인 매직 투어에선 맨 윗쪽 사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재킷을 걸치고, 빨간줄과 금색줄이 있는 백바지를 입었다.또 매직 투어 끝에서는 왕관과 빨간 망토를 걸친다.
- 1985년부터 타국에서의 라이브는 마무리 곡인 We Are The Champions직전 We Will Rock You를 부를 때에는 항상 유니언 잭을 펼치는데그 뒷면에는 공연하는 국가의 국기도 펼쳐져 있다.덕분에 타국 관객들의 환호성은 덤. 독일 공연 사진도 자세히보면 흑적황 독일국기가 희미하게 비춰진다.
- 1992년에 개봉한 웨인즈 월드 영화에 사용된 보헤미안 랩소디 음악은 주연 배우 마이크 마이어스가 프레디 머큐리의 허락을 받았다고 브라이언 메이가 밝혔다. 브라이언에 의하면 프레디가 작고하기 3개월전에 마이크가 직접 관련 장면 음원을 가져와서 프레디에게 들려줬다고 한다. 마이크 마이어스가 보헤미안 랩소디(영화) 영화에서 퀸(밴드)의 보헤미안 랩소디를 퇴짜 놓는 EMI 제작자로 등장한 것을 감안하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2018년 개봉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흥행에 힘입어 프레디 머큐리 패러디가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1997년 ‘허리케인 블루’ 이윤석까지 재조명되는 분위기. # 참고 기사 유세윤의 패러디가 가장 좋은 평가를 받는 중이다. 심지어 12월 9일자 개콘 봉숭아학당에서 곽범도 따라했으나, 프로그램 사정이 사정인지라 별 반향이 없었다. 이후 나 혼자 산다에서 전현무가 무큐리로 패러디하며 최고의 반응을 이끌어냈다. 2019년에는 베로카 CF에서 권혁수가 프레디 머큐리 분장을 했다.
- 2018년 한국 국민이 뽑은 최고의 인물 9위에 선정되었다.#
- 그의 이름을 딴 소행성이 있다. 프레디가 사망한 1991년에 화성과 목성 사이의 소행성대에서 발견된 ‘소행성 17473’이 그것. 2016년 9월 4일, 프레디의 탄생 70주년 하루 전에 브라이언 메이가 해당 소행성의 이름을 프레디머큐리라고 명명했으며 국제천문연맹(IAU)이 이를 승인하였다.# 이 소행성의 잠정 번호는 1991 FM3. 프레디의 이니셜과 같다.
- 로그라이크이자 리듬 게임인 인디 게임 Crypt of the NecroDancer에 등장하는 상인의 풀네임은 Freddie Merchantry인데 상인(Merchant)과 머큐리(Mercury)가 라임이 비슷하다는 걸 노린 말장난이다. 특이한 점이라면 인게임에서 상인은 배경음악에 맞춰 성악풍으로 노래를 부르는데 실제 프레디 머큐리가 성악을 좋아했던 걸 생각하면 단순 말장난 말고도 오마주라고도 볼 수 있다.
- 1980년 라이브에서 존 레논의 1971년 발매된 노래 Imagine을 잠시 부른적 있다. #
- 2019년 후반기에 뜬금없이 Youtube Poop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그의 노래에서 반주를 제거한 뒤 프레디의 대사로 삼아 상황극 영상을 만드는 방식. 대부분의 영상은 고생을 겪은 프레디가 MAMA를 찾으면서 마무리된다(…). 예시
<출처> 나무위키